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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에서 살았다고 하면 대부분 “잠을 못 자겠네요?”라며 농담을 던집니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때문이겠죠.
하지만 이제는 시애틀을 생각할 때 커피, 유덥, 에버그린을 떠올려주세요.
미국 시애틀은 저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도시입니다.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가서 8년을 지냈고, 아직도 가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움과 반가움이 교차하는 제2의 고향, 시애틀을 소개합니다.
먼저 시애틀에는 스타벅스 1호점이 있습니다. 커피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시애틀 필수 관광 코스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막상 가보면 대부분 실망하고 맙니다. 아주 작은데다 관광객으로 바글바글하니 여유롭게 둘러보고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스타벅스 1호점은 인증 샷만 남기고, 시애틀의 진정한 커피 맛을 음미하러 이동해봅니다.
시애틀은 10월부터 4월까지 1년의 절반은 비가 옵니다. 으슬으슬 추운 날씨에 추적추적 비까지 오니 커피를 마실 수밖에 없는 환경이죠. 길거리를 둘러보면 거짓말을 조금 보태 모든 사람이 커피를 들고 다닙니다. 이런 환경 때문인지 시애틀에는 다양한 로컬 카페와 유명한 바리스타가 많습니다. 그중 한 군데는 ‘빅트롤라 커피Victrola Coffee’입니다. 이곳은 우유 맛이 풍부한 카페라테로 유명합니다. 직접 볶은 원두의 씁쓸한 향에 고소함을 더해 더욱 맛이 깊습니다. 원목 느낌을 살린 인테리어 역시 유명세에 한몫 합니다. 조용히 공부하거나 일하기에 좋죠.
또 다른 곳은 ‘비바체Vivace’입니다. 아직 시애틀에 머물고 있는 대학 친구가 알려준 카페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는 카푸치노와 화이트 벨벳입니다. 화이트 벨벳을 맛본 순간 ‘내가 왜 이곳을 이제야 알았을까’ 아쉬울 정도였습니다. 말 그대로 벨벳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문 듯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치즈 맛이 입 안 가득 느껴집니다. 매일 마시기에는 부담스럽지만, 기분 전환용으로는 이만한 커피가 없을 듯합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시애틀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은 저의 모교인 워싱턴 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입니다. 1861년 설립됐으며 미국 북서부 지방에서 가장 큰 대학교로 유명하죠. 시애틀에서는 모두가 이 대학을 ‘유덥’이라 부릅니다. ‘UW’의 줄임말이죠. 고풍스러운 건물과 푸른 잔디가 아름답습니다. 특히 벚꽃이 만개한 쿼드Quad 광장은 유덥인의 자랑입니다.
우중충한 날씨 속에 학기를 보내는 학생들은 벚꽃 피는 4월이면 쿼드 광장에서 일광욕을 즐깁니다. 유덥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바로 수잘로 도서관Suzzallo Library입니다. ‘해리포터 도서관’이라고도 불리죠. 이 도서관 3층에 있는 Silence Study Room의 클래식한 인테리어는 해리포터 속 호그와트 마법 학교를 연상시킵니다. 말 그대로 조용히 공부만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대화를 나누거나 거슬리는 소리를 내면 가차 없이 경고를 받습니다. 처음 이 공간에 들어오면 숨 막히는 적막 속에 행동 하나하나가 어색하지만, 졸업할 때쯤 되면 비밀 검객이라도 된 듯 소리 없이 움직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캠퍼스를 걷다 보니 곳곳에 설치된 배너가 눈길을 끕니다. 2012년 포토 콘테스트로 새로운 배너에 들어갈 사진을 뽑았는데, 영광스럽게도 졸업식에서 찍힌 제 사진이 한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부모님은 ‘네 얼굴이 아직 유덥에 있다’며 배너의 안부를 전해주십니다. 뭐 하러 그런 걸 확인하느냐고 투덜거렸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나 봅니다. 저 역시 학교에 들를 때마다 배너를 살피곤 하니까요.
시애틀이 있는 워싱턴 주의 별명은 ‘에버그린Evergreen’입니다. 올림픽 국립공원을 비롯해 자연과 야생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아 사시사철 푸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에 있는 방울뱀산Rattlesnake Mountain도 편도 2시간 산행으로 멋진 절경을 볼 수 있어 등산객에게 유명합니다. 멋진 경치는 좋아하지만 체력은 부실한 저 같은 사람에게 안성맞춤이죠. 산을 오르다 보니 시애틀 나무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가는 가지가 하늘로 길게 뻗어 있더군요.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굳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아도 물을 공급받을 수 있어 시애틀의 나무는 그저 높게만 자랍니다. 그래서 태풍이 오면 커다란 나무가 뿌리 채 뽑히거나 쓰러지기도 합니다. 어느덧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산등성이와 호수를 바라보니 모든 스트레스가 날아간 듯합니다. 바람에 몸을 맡기면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 같아 절벽 바위 위에서 연신 점프를 해봅니다.
시애틀은 1년에 한 번씩 방문하는 도시라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롭기도 합니다. 8년이나 살았던 동네인데도 해마다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기 때문이죠. 어느덧 이곳을 떠난 지 3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제는 한국이 편해졌지만, 사랑하는 가족과 보낸 추억이 그곳에 있기에 여전히 시애틀 앞에는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습니다. 앞으로 시애틀의 진정한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 출처 : SK주식회사 C&C 사보 ‘Create & Challenge’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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