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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의 마루금 걷기] 수도가야종주를 통해 바라본 지지(知止)와 지지(GG), 그리고 존재산행
SK(주) C&C 블로그 운영자 2015. 10. 27. 09:00▲ 지지(知止)와 지지(GG)
저명한 학자인 고려대학교 철학과 이승환 교수님은 욕망과 절제에 관하여 『大學』을 인용하여 절제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멈추어야 할 곳을 안 후에 안정하게 되고, 안정된 이후에 고요하게 된다.
고요해진 후에 편안하게 되고, 편안해진 후에 사려할 수 있게 된다. 사려한 이후에 얻을 수 있다.
知止而后有定, 定而后能靜, 靜而后能安, 安而后能慮, 慮而后能得
- 大學 中 -
카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을 즐기라'는 말은 무절제하여 내일이 없는 즐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즉, 멈춰야 할 때를 아는 것이 현명한 자이며,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이승환,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관차에 브레이크 달기” 중 인용) 이는 백 번 맞는 말이지만, 종주 산행에서 “知止”를 넘어서는 존재산행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존재산행이란, 산행을 하면서 자아의 존재 가치를 느껴가는 산행을 일컫는데, 이른바 산 정상을 밟는데 있어 산을 정복하는 존재가 아닌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기 위해 산행하는 것을 말한다. 힘들고 높은 산을 등정하거나, 종주산행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의 산행 가치와도 일맥 상통한다. 나를 찾아가는 산행, 나를 알아가는 산행, 나를 이겨내는 산행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고 인생의 가치를 찾아간다.
잠시 주제를 벗어나, 다른 “지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이 한창이던 30~40대 세대는 지지(GG)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 것이다. GG란 'Good Game'의 약자로, 게임이 일방적으로 기울어, 게임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이다. 즉, 'Give-up'과도 일맥상통한다.
인생에서건 산행에서건 우리는 Plan – Do – Finish 활동을 통해 성취(Achieve)한다. Finish 없는 성취는 있을 수 없다. Finish를 하려면 성취감이 높되 수행이 가능한 Plan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하는 수행(Do)이 있어야 한다. 종주 산꾼들은 산행 이전에 산행 계획을 세우며 자신이 종주에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지 갈음을 하며 체력을 준비한다. 그리고 자신을 이겨내며 종주산행을 완성한다. Give-up과 자신의 존재가치 사이에서 갈등을 하지만, 이를 이겨 내며 종주산행을 완성하고야 만다. 종주 산행길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여기가 멈춰야 할 상태인지 하는 내 안의 번민을 이겨내는 것은 종주 산꾼들의 탐닉의 세계다. 지지(知止)를 이겨내는 의지와 정신력 속에서 생겨나는 힘든 과정이 나를 부수고, 부순 만큼 성숙해진 나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프로젝트는 과정이 힘들고 복잡하며 나에게 주어진 과업이 너무도 고되어, 아침마다 출근여부를 나약한 나에게 물을 때도 있다. 힘든 프로젝트 진행 중에 GG를 치는 것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아 이를 악다물고 3개의 차세대 프로젝트에 끝까지 몸담으며 동료들과 수행을 종료하였다. 특히 차세대 프로젝트는 힘든 마루금을 타는 것과 같아서 인내를 갖고 노력을 통한 수행이 있어야만 한다. 힘든 만큼 성공적인 수행을 완성하게 된다면 그 성취감은 배가 된다.
▲ 수도 가야 종주의 시작
수도 가야 종주란, 수도산부터 가야산을 잇는 마루금을 종주하는 산행으로, 실거리 28km, 도상거리 25km 산행 코스이다. 수도산부터 두리봉까지는 수도지맥을 따라가며, 두리봉 분기점에서 가야산 칠불봉까지는 산죽이 많은 험한 마루금을 따라 이동해야 한다. 2015년 10월 9일 새벽 3시 33분, 경북 김천시 증산면 수도암 입구에서 5명의 SK주식회사 산오름 회원들은 헤드렌턴을 켜고 임도를 따라 2km 정도 경사면을 따라 오르면, 수도암 입구에 도착한다. 수도암 안으로 들어가 우측 사면을 끼고 오르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오르막을 따라 약 2km를 오르니 시야가 트이고 주능선길이 시작된다. 아직 동은 트지 않고 어둡지만, 가을을 알리는 시원한 바람에 나의 허파꽈리들이 신선한 산소주머니로 변화됨을 느낀다.
나무 계단과 바윗길을 따라 200미터를 지나면 수도산 정상에 도착한다. 어둠 속에서 간단히 사진을 찍고 오르던 수도산을 되돌아 50미터 지점에서 우측 길로 이동하여 단지봉으로 가는 길로 나선다. 가던 길을 도중도중 멈추면서 인원 체크를 하는데, 먼저 간 김태용 과장이 보이지 않는다. 남은 4명의 그룹을 추려 단지봉 정상에 도착하니, 김태용 과장이 먼저 도착해 등산용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린다. 전날 제안서 작업 때문에 밤을 새고 와서 많이 피곤한 듯 했다. 다시 5명이 도킹을 하여 마루금을 걷는다.
천미터 이상의 높이의 능선길이기 때문에 시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예상 외로 뿌연 연무로 인해 그다지 시야가 좋지 않았다. 대신, 올해 수도지맥을 종주했던 선배들이 잡목과 잡풀들이 많아서 걷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으나, 10월이라 그런지 길을 찾거나 걷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수도암으로 가는 임도 시작 길에서(좋은 사람들 txdata님 제공)
수도암 도착하여 안으로 진입(좋은 사람들 txdata님 제공)
별들이 총총한 새벽녘에 수도산 도착, 오늘 리딩한 죠은생각 대장(좋은 사람들 txdata님 제공)
새벽녘 어스름 피는 단지봉 헬기장 풍경
헬기장에서 단지봉 가는 길, 가뭄으로 바싹 마른 나뭇잎이 거의 바닥에 누워버렸다
단지봉 정상에서 최철우 부장님
단지봉부터 좌일곡령까지는 시야가 제법 장쾌하여 가슴이 탁 트인다. 마루금을 빗겨 부는 갈바람에 머리카락은 한올한올 산죽잎처럼 하늘거린다. 제법 꽃불을 놓은 산마루의 단풍들이 암릉들과 엮여 장관을 이룬다. 아직 산 아래는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천미터 이상 높이의 능선 길에 가을이 여지 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암릉 위로 올라가 사진으로 능선길에 밑줄과 별표를 친다. 다시 늘씬한 마루금을 디딤발로 이어 나가면 어느 새 좌일곡령에 도착한다. 좌일곡령은 “고개”라기 보다는 “봉”에 가깝다. 좌일곡령을 가리키는 푯말도 “좌일곡령(봉)”이라 써있다. 앞으로 두리봉까지는 약 7.5km를 지나야 한다. 김태용 과장은 여기서 하산을 하겠다고 한다. 전날 업무로 인해 체력이 많이 약해진 탓이리라. 그는 멈춰야 할 곳이 여기임을 알고 지지(GG)를 친다.
좌일곡령을 지나자 밧데리가 없어, 휴대폰이 꺼져 버렸다. GPS를 켤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순전히 지도만을 가지고 수도지맥 길을 가야 한다.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종주길을 걸었다.
산죽길을 헤칠 때마다 얼굴을 스치는 잎새 느낌은 상쾌하다. 자연과 온몸을 부비부비 하는 것은 내 공명을 울려 무심코 음표를 쏟아내는 것처럼 마냥 즐거운 것이다.
산길을 지나간 흔적들은 더욱 희미해지고, 4명의 일행들은 가야산을 방향으로 하여 마루금 길을 집중하여 산행을 진행한다. 가지 사이를 뚫고 진행해야 하는 종주길은 속도를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드디어, 목통령에 도착하고, 우회전을 하게 되면 용암리 하산길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용암리 하산이 아닌 아직은 머나먼 가야산이다. 두리봉까지는 약 4.2km를 더 가야 하며 12시간 만에 하산을 해야 하기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두리봉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법 아름다운 단풍 접사
단풍속에서 가을을 즐기는 종주산꾼 이행현 과장
좌일곡령으로 가는 종주길의 단풍
늘씬한 마루금에 우뚝솟은 암릉 위에서 범진씨
단풍이 물든 마루금 속에서 이행현 과장
좌일곡령 푯말, “령”이라기 보다는 “봉”이 맞다
목통령으로 가는 험한 암릉길
드디어 목통령 도착
두리봉을 향한 아름다운 수도지맥길
마루금 우측으로 용암리 마을이 보이고
두리봉에 가까워질수록 웅장한 가야산의 위용이 가까워진다. 마치 온몸을 비틀어 승천하는 용의 대가리와 같다. 체력은 점점 바닥이 나고 드디어 최철우 부장님과 이행현 과장의 속도가 점점 느려진다. 선두 파트는 다시 속도를 줄여 4명을 모았다. 최철우 부장님은 무릎이 좋지 않다고 한다. 그는 종주를 끝마치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일행을 위해 두리봉 정상에서 해인사 방향으로 하산하겠다고 했다. 필자(筆者)는 그의 결정이 지지(GG)가 아닌, 탁월한 지지(知止)라고 생각했다. 당신을 위한 하산이 아닌, 남은 자들의 성공적인 종주를 위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하산은 포기가 아닌 배려이다. 우리는 팀을 이루어 어려운 고행 길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감싸준다. 그러므로, 종주 산행은 결과보다도 함께하는 과정이 더 매력적이다.
가야산의 위용이 점점 나타나고
가야산과 함께한 최철우 부장님
두리봉 정상에는 정상석이 없으며, 대신 삼각점이 있다
두리봉에 도착하여 우린 뒤를 돌아 지나온 마루금을 되돌아 본다. 수도산부터 두리봉을 지나 오목하게 파여 보이는 목통령까지 아득하다. 우리가 지나온 길이 하나의 선을 이루어 아름다운 길을 이루었다니 뿌듯했다. 어떤 산꾼들은 앞만 보며 걷는다. 뒤를 돌아봐야 비로소 내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길었는지, 짧았는지,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반성이나 자기평가 없는 삶은 발전이 없는 그럭저럭 사는 인생일 것이다. 프로젝트도 마찬가지, 통찰력 있는 Lessons Learned를 통해서 차후 프로젝트에 개선사항을 적용했을 때 더 발전된 프로젝트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두리봉에서 최철우 부장님과 안녕을 고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손에 잡힐 듯한 가야산은 직선 거리가 아닌 지그재그(zigzag) 자의 능선길을 이루어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500미터만 걸으면 될 듯 가까워 보이지만,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산죽길은 2미터가 넘어 얼굴이 산죽 숲에 폭 파묻혀 걸어야 한다. 가야산에 비로소 가까워지자 급경사 오르막이 시작된다. 급경사 오르막을 따라 사면 길을 걸으니, 드디어 상왕봉 도착한다. 이행현 과장은 체력이 다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고, 우린 더욱 힘을 불어 넣어 칠불봉까지 데리고 가 사진을 찍고 하산길로 접어든다.
이제 버스 출발시각까지는 약 1시간 반, 모든 신경을 걷는 데 집중하고 부리나케 걸어 시간 내에 도착하여 28km의 장거리 산행을 마무리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가야산이 드디어 눈 앞에 나타나고
가야산의 암릉과 단풍의 조화. 달리 국립공원이 아니다
이행현 과장님과 함께 상왕봉 아래 쉼터에서
여정이 성공적으로 끝나가니 행복한 범진
가야산 정상, 우두봉이라 적혀 있으나 일반적으로 상왕봉이라고 한다
해인사로 내려가는 지능선과 함께
가야산 칠불봉 도착 인증 이행현 과장
하산길 만물상을 배경으로 이행현 과장
산은 정복하는 대상이 아닌, 나의 존재를 알아가는 상대. 그것이 존재산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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