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어린 시절부터 나는 ‘영국’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잿빛의 우울한 도시 풍경, 살 떨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물가, 맛없기로 악명 높은 음식까지. 아니나 다를까. 암스테르담 상공에서까지 구름 한 점 없이 맑던 하늘이, 영국 영해에 가까워지자 거짓말처럼 궂어졌다. 급기야 히스로 공항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의 첫 유럽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 <킹스맨>을 봤다.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은 터라 영화 속 영국 남자들의 슈트 문화가 흥미로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킹스맨’의 아지트는 실제 새빌로Savile Row에 위치한 ‘헌츠맨Huntsman’이라는 맞춤 양복점Bespoke Tailor이라 한다. ‘새빌로 스타일’이라는 단어가 패션사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슈트의 역사와 스타일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유서 깊은 거리. 이곳에선 영화 속 해리처럼 멋지게 양복을 차려입은 신사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다.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방직업이 빠르게 발전한 영국은 예로부터 왕실과 귀족이 패션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 덕분에 영국의 슈트 산업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일반 백화점 남성복 코너에 걸려 있는 기성복마저도 기품이 느껴질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출퇴근 시간 대중교통에서 ‘만난’ 영국 직장인들의 옷차림이란! 하루 종일 입고 업무를 봐야 하는 복장임에도 불구하고 정갈해보였다.
몸에 꼭 맞는 셔츠, 색을 맞춘 타이와 양말까지 완벽한 스타일링이었다. 덕분에 영국에서 지내는 열흘 내내 눈이 즐거웠다. 영국 남성 패션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구두’다. 영국 구두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견고하게 제작돼 밑창을 갈기만 하면 오랫동안 신을 수 있다.
세련된 현대 슈트 문화와도 잘 어우러져 그 인기가 상당하다. 이탈리아 구두와 달리 무겁고 단단한 느낌이면서 미국 구두보다는 고급스러운 멋을 자아낸다. 영국 구두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노스 햄프턴North Hampton은 이미 19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 구두를 공급하는 산실로 자리매김해왔고, 2,000여 명이 넘는 구두 제조업자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영국 중심부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도 크게 작용해 자연스럽게 가죽과 구두 공장이 생겨났다. 남성 구두 마니아라면 한 번쯤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팩토리 숍 투어’에 참여하면 구두 제작 공정을 직접 구경할 수 있으며, 평소 접하기 어려운 브랜드 제품을 할인 가격에 구입할 수도 있다. 다만 런던 중심가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데다 브랜드별 영업시간이 달라 꼼꼼한 일정 관리는 필수다.
큰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며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마다 행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계단에서 조금이라도 버거워하고 있으면 망설임 없이 “May I help you?”라며 짐을 들어주던 영국인들. 이렇듯 여러 사람이 좁은 공간에 있는 경우엔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늘 주변을 신경 쓰는 이들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마치 선진국 국민이라는 자부심,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책임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같았다. 낡은 시스템, 비좁은 좌석 등 런던 지하철은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지하로만 들어서면 무용지물이 돼버리는 스마트폰이다. 그래서 하루는 가만히 지하철 내 승객을 관찰해보기로 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모두들 책이나 신문을 보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낡은 지하철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No service’를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런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자유롭게 쓰고 싶으면 중계기를 설치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경우 휴대전화 벨소리나 통화 소리에 지하철 내 소음이 심해지기 때문에 차라리 통화는 지하철 밖에서 하는 것이 낫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불편함을 인내하고 더 큰 이익을 취하는 영국인의 또 다른 멋이 아닐까 싶었다.
영국 시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왜 영국 음식은 맛이 없을까?’ 섬나라여서일까? 하지만 같은 섬나라인 일본은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고, 제주도 역시 맛집 탐방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왜? 마침 대학원에서 영국사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과 일정이 맞아 영국 음식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꽤나 신빙성 있고 흥미로운 내용이었는데, 내용인즉슨 다음과 같다. 변덕스럽고 흐린 날이 잦은 기후 탓에 양질의 채소가 자라기 어려운 환경인 데다 청교도혁명을 통해 금욕주의가 나라 전체를 뒤덮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업혁명 때문에 농민들이 돈을 벌러 도심의 공장으로 떠났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그들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면서 시간과 돈을 아끼기 위해 요리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왕실과 귀족의 관심으로 발전을 거듭한 패션 문화와는 달리 요리에 공을 들이는 것을 사치라 여겨 음식 만드는 직업을 천대하기에 이른 영국의 음식 문화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유명하다는 피시&칩스 전문점을 찾았지만, 역시나 역사를 증명하듯 ‘웃픈’ 경험만 하게 됐다. 대신 아이러니하게도 대영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나라들의 음식이나 외부에서 유입된 다양한 국가의 음식을 맛보며 열흘 내내 행복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영국인의 꽃 사랑은 대단하다. 슈퍼마켓, 지하철 입구, 가로등, 우체통 등 거리 곳곳이 꽃으로 가득하다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입구에 꽃 장식이 많은 펍이 가장 유명한 펍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다. 영국인은 지인의 집에 초대됐을 때 그 지인의 성격이나 집 분위기에 어울리는 꽃을 직접 준비해가는 문화가 있다. 여유가 있는 경우엔 직접 본인의 뜰에서 가꾼 꽃으로 손수 꽃다발을 만들기도 한다니 일상생활에서 꽃 문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영국인이 꽃 만큼 사랑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 2세다. 즉위 60년을 훌쩍 넘긴 그녀는 여전히 영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어린 공주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지도층의 솔선수범을 보여줬고, 전쟁 후에는 몰락할 위기에 놓인 영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외교 사절을 자처했다. 화려함과 오만을 쫓지 않고 늘 낮은 곳에 있는 국민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겸손의 리더십’을 보여온 그녀이기에 버킹엄 궁전은 외국인을 비롯한 영국 국민에게도 큰 관심 대상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스코틀랜드 근교 궁전에서 여름을 보낼 동안엔 19개의 웅장한 접견실The State Rooms이 관광객에게 공개된다. 운 좋게도 내가 런던에서 머물던 시기에 공개돼 방문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러움’ 그 자체였다. 왕실에서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품과 각국 정상이 함께할 때 쓰이는 연회장 등 웅장한 규모와 화려함에 압도됐다. 더불어 여왕의 거처 자체가 이렇게 멋진 관광 상품이 돼 세계 곳곳에 그 위상을 드높이고 있고, 자국민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는 사실이 정말 부러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견문을 넓히다’라는 말은 단순히 관광지에서 유명한 건축물을 보거나 그 나라의 맛있는 전통 음식을 먹을 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다. 낯선 곳을 직접 부딪혀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느끼고 깨우치는 ‘사고의 훈련’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번 영국 여행은 나에게 있어 내 안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깨는 계기를 만들어 준 여행이었다. 애초에 기대치를 낮추고 욕심을 비우고 시작한 여행이었기에 그 빈 공간에 긍정적인 변화를 채울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더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런 사고방식의 폐해(?)로 남들이 다 한 번씩 가보는 명소들은 짧게 머물거나 거의 스치듯 지나갔지만 나는 여전히 이러한 여행 방식을 선호한다. 어느 순간 문득 정신 차렸을 때 그네들의 일상 속 삶에 완벽히 녹아든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 더욱 소중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여행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지금 이런저런 생각에 여행을 망설이고 있다면, 그 망설임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단, 여행에서 ‘꼭 무언가를 보고 느끼고 얻어 올 거야!’라고 부담감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평소에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일부분을 일깨워주는 것이 ‘낯선 곳’이 가진 최고의 매력일 테니 말이다.
'Storytell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인문학] 물회는 우리의 밥이다 (0) | 2015.08.27 |
---|---|
지역과 사람이 공존하는 전통 리조트, 행복전통마을 ‘구름에’ (0) | 2015.08.25 |
GSP(Global expertise Sharing Program) 1기 체험기 "열정 DNA를 찾아서" (0) | 2015.08.17 |
[사회적 기업] 오르그닷, 윤리적 패션을 부탁해! (0) | 2015.08.17 |
- Total
- 5,153,292
- Today
- 110
- Yesterday
- 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