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베르(Homo Faber)는 도구의 인간을 뜻한다.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는 근면 성실한 ‘개미’를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인간을 의미한다면, 호모 파베르는 마르크스의 노동의 인간을 뜻한다.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가 19세기 이후 인류 사회의 규범으로 세속화되면서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실행하는 사람이 대접받게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그의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지성을 인공적 대상을 제작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이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호모 파베르에 가깝다는 주장을 했다. 호모 파베르로서의 인간은 IoT, 빅 데이터, 인공지능, 지능형 로봇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위한 극한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공지능 슈퍼컴퓨터 ‘왓슨’이 인간과의 퀴즈 게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제 호모 파베르는 대부분의 생산을 위한 노동을 기계로 대체하는 초 생산성 사회로 진입시키고 있다.

한편, 호모 루덴스(Homo Ludens)는 놀이하는 인간을 의미한다. 역사학자인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인간만의 특징을 놀이로 파악했다. 그는 종교, 법률, 경기, 전쟁, 철학, 예술 등 인류의 모든 문화가 놀이에 기원을 두고 있고, 놀이는 그러한 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역사적 관점으로 논증했다.

호모 파베르가 지성으로 물질을 만드는 인간이라면, 호모 루덴스는 물질적 이해와 상관없는 놀이에 몰두하는 인간이다. , 호모 루덴스가 ‘재미’라면 호모 파베르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재미를 위해 사는가, 의미를 위해 사는가? 재미가 ‘나’를 위한 내적 가치라면, 의미는 ‘세상’을 향한 외적 가치일 것이다. ‘의미’ 없이 재미만 탐닉하면 사회와 유리되고 ‘재미’ 없이 의미만 추구하면 개인은 탈진한다. 재미와 의미가 융합된 목표가 우리를 설레게 하는 것이다. 성공적인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는 일터로 향할 때의 ‘설렘’ 차이가 아닐까. 등산가와 비교하자면, 등산가도 거대한 산의 규모와 높이에 중압감을 느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려운 과제는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중압감을 준다. 하지만 너무 쉽고 일상적인 일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 못한다. ‘설렌다’는 것은 의미 있는 목표의 예측이 불확실하다는 뜻과 통한다. 모든 것이 확실하면 설레지 않는다. 불확실한 가치에 도전할 때 사람들은 열정을 불태운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목표는 사회에는 가치 있는 성과를 남기고 개인에게는 자아성취를 제공한다.

‘설렘’을 안고 높은 산에 도전해 보자. 올라가는 과정은 힘들기도 하지만 즐겁기도 하다. 고통과 기쁨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존재한다. 고통 없는 재미는 마약에 가깝고, 재미없는 의미는 지옥에 가깝다. 산을 오르는 과정에 휴식이 필요하듯 우리 삶에도 중간 휴식이 필요하고 휴식을 하며 다음 목표의 설렘을 되찾는다. 마침내 우리는 정상에 도달하고, 목표를 달성한다. 성취감은 뿌듯함으로 이어진다. 나에게는 ‘재미’를 세상에는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부심도 얻어진다. 힘든 운동을 통해 근육이 강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시련을 통해 마음의 근육이 강화된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 정신적 스트레스가 없다면 새로운 마음의 근육이 생기지 않는다. 의미 있는 목표에 재미있게 도전할 때 소위 멘탈이라는 마음의 근육이 강화된다. 결국, 일을 대하는 가장 현명한 자세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와 호모 파테르의 융합이다.


♣ 출처 : SK주식회사 C&C 사보 ‘Create & Challenge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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